스웨인 휘슬러:...네,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면 길 한복판에서 이러고 있었구나. 눈 앞의 이해가 안되는 현실은 둘째치고 일단 일어나는게 맞겠구나 싶어 행인의 손을 잡는다.)
행인: 정신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네요. 아무리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고 해도 아픈 건 똑같으니 몸이 안 좋으시다면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스웨인 휘슬러:네?
스웨인 휘슬러:죽은 사람이라니요?
행인: 어… 네.
죽은 사람은 장례로부터 1년 후에 돌아오는 게 당연하잖아요?
스웨인 휘슬러:.................. (할 말을 잠시 잊고 멍하니 있는다.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니 그게 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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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인 휘슬러:(내가 죽은지 1년만에, 크로쉬가? 아니, 크로쉬가 맞나?)
……이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요?
지금 당신이 죽은지 얼마나 지났죠?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신의 수중에는 날짜를 확인할 물건이 없으니까요.
눈앞의 사람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눈 앞의 사람에게 물어보자. 고개를 두어번 흔들곤 행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됩니까. 년, 월, 일 전부요.
행인: 네? 그거야….
행인은 휴대용 전자기기로 연도와 날짜를 확인하더니 당신에게 알려줍니다.
오늘은 당신이 죽은 날로부터 정확히 100년 후입니다.
스웨인 휘슬러:................................................허. (넋빠진 소리가 아주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100년? 100년이라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1년만에 돌아온다더니 100년은 뭐고, 그럼 그동안 크로쉬는 뭘......)
(설마.)
행인: 이만 가봐야겠어요. 오늘은 죽은 아내가 돌아오는 날이거든요.
행인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합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세계.
100년동안 늙지도 죽지도 않는 크로쉬에 관해선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는 세계.
그야, 이 클리셰 SF 시나리오는 죽은 사람도 돌아오는 세계관이 되어버렸거든요.
::핸드아웃 〔100년 후의 세계〕공개
.................(멀리 떠나간 행인에게 감사인사도 하지 못할 만큼 넋을 빼놓고 서 있다. 눈이 흩날리고 화면에서는 네가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말한다. '이곳'은 내가 알던 곳이 아니다. 그럼, 화면 속의 '너'는 내가 알던 사람이 맞을까?
스웨인 휘슬러:아냐, 이럴 때가 아냐. 크로쉬. 크로쉬를 찾으러 가야해. (멍하니 풀려 있던 얼굴은 금세 근육을 당겨 긴장하게 만든다. 이렇게 서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를 찾아가 이 상황을 물어야한다. 그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건, 그의 거주지 앞까지 가서 생각해도 될 문제였다.
그렇다면 크로쉬는 어디에 있을까요?
스웨인 휘슬러:(그럼 가장 큰 문제. 크로쉬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주변에 무작정 묻는다고 가르쳐줄 것 같지 않고 대부분은 모르겠지. 그나마 다행인건 죽었다가 살아돌아온다는 특수성 때문에 이 복장으로 돌아다닌들 눈초리를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도서관 같은 시설에 찾아가서 검색해도 될 것 같다.)
일단 전광판에 얼굴이 들어날 만큼 유명 인사라면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스웨인 휘슬러:(응대직원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여쭐 것이 있는데요.
당신의 물음에 직원은 상냥하게 웃습니다.
센터 직원: 안녕하세요! 안전지대 제3 지원센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스웨인 휘슬러:(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자료 조사를 하고 싶은데, 여기 정보 열람실이나 검색실이 어디 있을까요.
센터 직원: 저런, 죄송하게도 정보 열람실은 개인 출입이 불가하십니다. 검색실 이용은 가능하십니다! 또한 별도로 필요한 자료를 말씀해 주신다면 빠르게 찾아 제공이 가능한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스웨인 휘슬러:...(한 번 더 고민. 그러다 입을 열었다.) 아까 들어오는 길에 전광판을 보니 까만 피부에 까만 머리, 그리고 안대를 쓴 남자분이 화면에 나오시더라구요. 그분이 혹시 누군지 아시나요.
직원의 눈에 순간 당신을 의심하는 빛이 스쳐 지나갑니다.
센터 직원: 네? 크로쉬 님을 모르신다고요? 혹시 기억 상실이라도 오셨나요? 이곳 안전지대의 관리자시잖아요.
스웨인 휘슬러:(역시, 크로쉬가 맞구나. 한숨을 작게 쉬곤 무해한 척, 머리를 살짝 헤집으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죽었다 살아났더니 기억에 약간 이상이 생겨 그렇습니다.
센터 직원: 저런, 그러셨군요? 정말 드문 일이라고 들었는데 눈앞에서 보니 신기해서 그만…. 크로쉬 님은 안전지대의 전반적인 관리를 맡고 계십니다. 정치를 비롯해 법 제정부터 재판까지 직접 하시죠.
기본적인 정치를 비롯해 법 제정부터 재판까지 직접?
그건 그냥 독재자 아닌가요?
스웨인 휘슬러:............(잠시 헛숨을 삼켰다가 애써 태연한 척 떨리는 손을 주먹쥐며 직원에게 말을 이어했다.) 중요한 분이신건 알겠는데 기억이 도통 나질 않아서요. 저분에 대한 정보 제공을 빠르게 받을 수 있을까요?
센터 직원: 음, 크로쉬 님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제한되어 있어서요.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저 건물에 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직원은 도시 중심부에 있는 가장 높은 건물을 가리킵니다.
아, 저곳은…….
AOC의 건물입니다.
센터 직원: 만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방문 절차를 밟으시고 운이 좋다면 직접 뵐 수도 있을 거예요.
이 정도 도움밖에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스웨인 휘슬러:아뇨, 아닙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수고하세요. (본인이 AOC의 옷을 입고 있지만 이것에 관하여 직원이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보아, 크리쳐는 당연하고 AOC도 없는 세계구나 싶어진다. 친절히 응대해준 직원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건물 밖을 나섰다. 가야해.)
스웨인 휘슬러:(이 곳. 소장실. 우리를 괴롭혔던 그 멍청이들이 살던 곳을 네가 차지했구나. 그렇게 싫어하더니. 그리 생각하며 올라온 층에서 보이는건 낯익은 뒷모습. 각오하고 온 곳이다만, 그 모습을 보자니 숨이 들이삼켜진다.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듯 천천히 돌아보는 크로쉬의 얼굴에는 화면과 똑같이 안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세월은 정말 실감 나지 않습니다.
그야, 당신과 크로쉬는 이렇게나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걸요.
잠시간의 침묵, 크로쉬의 표정을 읽기 어렵습니다.
크로쉬 일럼:스웨인 휘슬러.
크로쉬는 낮게 당신의 이름을 읊조립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그는 당신에게 다가와
당신의 팔을 붙잡습니다.
여전히 그는 표정을 읽기 어렵습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의 이마를 타고 내려오나 싶더니, 안대 위에 안착합니다.
가려지지 않은 검은 눈망울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립니다.
크로쉬 일럼:정말 보고 싶었어.
스웨인 휘슬러:....................크로쉬 일럼. (사실 그리움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더 크다. 그도 그렇듯 나는 그에게 작별을 고했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게 끝이었다. 그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여기였지. 그러니 나는 너를 봤다는 재회의 반가움보다, 네가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맞을까에 대한 의문이 더 먼저 들어버리는 것이다. 아주 배은망덕하게도.)
....네가 크로쉬라고?
크로쉬 일럼:(이어지는 말에 까딱,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진다. 무슨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이.) 그럼, 내가 크로쉬 일럼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어? 보자마자 하는 말이 내 존재를 의심하는 말이라니 이거 참. 그러는 넌 네가 스웨인 휘슬러라고 증명할 수는 있어?
스웨인 휘슬러:글쎄. 다른건 몰라도 내가 어떻게 네 눈 앞에서 사라졌는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마른 세수를 한 번. 얼굴을 덮은 손 아래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그렇다쳐도 너는 이게 꼴이 뭔데.
크로쉬 일럼:그래? 나는 네가 사라질 때 나한테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는데. 이러면 되나? (빙긋 웃는 얼굴이 속내를 알 수 없다.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움직여 슬며시 손을 그러잡는다.) 오느라 힘들었을 것 같은데. 우선 식사라도 할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 같은데. 무거운 이야기를 하기엔 여긴 너무 삭막하잖아.
스웨인 휘슬러:....................(속이 복잡했지만 그를 거부할 힘도 없었다. 단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물 좀 줘. 배 안 고프니까. (밖에 없었다. 사실 술이라도 하고 싶었건만 자칭 오랜만에 만난 그의 앞에서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크로쉬 일럼:그럼 식당으로 가자. (그대로 네 손을 잡아 끌어 소장실 밖으로 나선다. 네 의견은 상관 없다는 듯.) 있지. 네가 없던 사이에 여러 가지로 일이 있었어. 어떤 일이 있었을 것 같아?
스웨인 휘슬러:................글쎄. 하나도 모르겠네. 네 말대로, 나는 그 동안 없었으니까. (아, 뭘까 이 불쾌함. 왜 네가 네가 아닌 것 같을까.)
두 사람이 식당에 들어서면 새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직사각형 식탁 위로 섬세하게 세공된 은색 식기들이 하나둘 올라갑니다.
따뜻한 수프와 바게트, 소스와 아스파라거스가 어우러진 폭립 스테이크와 풍미가 훌륭한 와인까지!
접시마다 담긴 음식은 전부 식욕을 돋우는 것들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식사를 꽤 굶은 것 같아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먹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크로쉬 일럼:(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가볍게 지휘하듯 흔들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래, 벌써 100년인가?
네가 목숨과 맞바꿔 지킨 안전지대는 내가 보호하고 있지. 네 유지를 이어받을 사람이 내가 아니면 또 누가 있겠어? 하하, 네게 영웅 심리라는 게 옮은 거려나?
이 세계에서는 아무도 굶지 않고, 아무도 외로워하지 않고, 아무도 죄를 범하지 않아. 오로지 내 통제와 계산으로만 굴러가고 있으니까. (끼기긱, 고기를 썰던 나이프가 길게 접시를 긁어내며 소음을 만든다.)
… 아, 물이 마시고 싶댔지?
크로쉬의 손짓에 따라 웨이터가 당신 앞에 놓인 잔에 물을 따릅니다.
크로쉬 일럼:그래서 지금까지의 이야기 중 궁금한 점은?
스웨인 휘슬러:(식사도, 마실 것도, 하물며 물조차도 입에 대지 않았기에 바짝 말라버린 입을 벌렸다. 아, 정말이지. 난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계의 것이랑 계약이라도 했어? 100년이라고 말하는거 치곤 그대로인데.
크로쉬 일럼:아, 그쪽? 뭐, 나는 애시당초 능력이 뛰어났잖아? 과학의 발전이란 무궁무진하니까. 그렇다면 수명을 늘리거나 죽은 사람을 되돌아오게 하는 것 쯤은 어렵지 않지. (빙글, 포크를 돌리더니) 넌 아예 육체조차 남지 않아서 무리였지만?
스웨인 휘슬러:크리쳐의 재생 능력을 사람한테 쓰기라도 했나보네. 뭐, 어차피 실험체였고 변질됐으니까 차라리 그랬다면 덜 놀랬을텐데 말이지. (등받이에 기댄 몸의 무게를 의자가 견디지 못하고 작게 끼익 소리를 낸다.) 그런거치고는 안 놀라네.
크로쉬 일럼:글쎄, 어땠을까? 그닥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다. 정말 사소한 일이라는 것처럼) 그야 외관은 이렇지만 벌써 100살이 넘었는 걸. 놀라는 것도 웃기지 않아?
그날 네가 몸소 보여준 '숭고한' 희생을 보고 깨달았거든. 나는 이런 세상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내 정의라고 믿어. 네가 가르쳐줬잖아?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선 다소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숭고해? 그딴게? 하, 너 정말 크로쉬 일럼이 맞아? 내가 아는 크로쉬였다면 내 멱살을 잡고 뺨부터 후려 갈겼겠지. 보고 싶었다고 속살거리고 테이블 다리가 휠만큼 음식을 내어주는게 아니라 장난하냐고 고함부터 질렀을거야. 나는, 그래. 그래 내 사랑의 정의. 그래. 그건 세상이 아니라 온전히 너를 위한거야. 그렇게 똑똑하다더니 내 행동에서 배운게 이런 독재자의 면모라고?
100넌이 지나면서 진보된게 아니라 퇴화됐네, 너. 네 입으로 희생을 논하고.
크로쉬 일럼:(제 앞에서 한껏 자신을 쏘아붙이는 이가 있음에도 여유롭게 와인을 한 모금 넘길 뿐이었다. 탁, 테이블 위로 반쯤 비워진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네가 알던 크로쉬 일럼은 그랬겠지. 하지만 널 떠나보낸 후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그대로이길 바라는 건 오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스웨인 휘슬러. 닿지 않는 이에게 향하는 원망 같은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알고 있어? 온전히 나를 위했던 일이라고 속달거려도 네가 날 두고 죽어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런 네 의도를 기억하는 것도 나. 오로지 나뿐. 그렇다면 내 멋대로 변질시켜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거야. 네가 이 안전지대의 영웅으로 불리고 지금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스웨인 휘슬러:그래, 그건 오만이지. 나는 네게 고정되라고 말한게 아니지만, 그래. 너답지 않다는 뻔하고 고지식한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거든. 그래, 너를 위한 사과를 해야할지 말지 고민이라도 했는데 아니었네. 그것도 오만이었어. 기억이라는건 아는 사람의 것이고 당사자하고는 상관도 없고 나의 행동은 너를 왜곡했으니 내 행동은 부질없어졌구나. 우리 둘 다 서로한테 할 말이라고는 비수를 꽂는 말 뿐이고. 헛짓거리 했어. 정말. 너라도 살라는 말 하나로 네가 AOC의 그 멍청한 늙은이들처럼 변할 줄 알았으면 하지 말걸.
그래. 내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고쳐 먹은 것 같아 다행이야. 사과를 할 필요가 어디 있어? 너도 필요했으니까 한 일인데. 네 말대로 난 살아 있었고 앞으로도 살아갈 거야. 그게 어떤 형태로든. (다시 칼을 들어 천천히 고기를 썰어낸다. 나이프에 움직임에 따라 덜 익힌 고기에서 핏물이 새어 나온다.) 그럼 스웨인,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스웨인 휘슬러:말해.
끼익, 접시를 가르는 소리가 한 차례.
눈꺼풀이 내려앉는 소리.
크로쉬 일럼:그만 좀 찾아와.
크로쉬 일럼:누누이 말했잖아, ‘소중한 너’를 죽이는 것도 힘들다고.
이 타이밍에 크로쉬는 품에서 총을 꺼내 쏩니다.
탕─!!!!!!!!!
당신이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어딘가에 통화를 거는 크로쉬의 모습입니다.
..........크로쉬. 크로쉬 일럼. (혀 끝에서 나오는 말은 달다. 무엇하나 먹은 것도 없는데 네 이름을 말하고 너를 바라보면 온 몸이 행복함으로 따스히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네가 내미는 머그잔처럼 온 몸을 데워줄 그 온기를 가진 너를 내가 거부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단, 이게 정말로 내가 아는 현실이라면 그러했겠지. 저 밖에서 인형의 집 안을 바라보는 어린 아이의 눈동자와 같은 검은 눈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나는 네 옆에 남았겠지.)
(나는 해야할 일이 있었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 해야할 일 역시 너를 위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곁에 남아달라는 네게 말했다. 고하듯이, 아주 천천히. 미안함을 담아서.) 미안, 크로쉬. 할 일이 끝나면 그때 돌아올게. 여기 있을게.
너랑 크리스마스 파티도 하고 케이크도 먹고 시시한 영화를 보면서 웃을게. 그러니까.... 밖에 좀 다녀올게. 그래도 될까?
크로쉬는 약간 쓸쓸한 표정으로 소파 옆자리에 앉습니다.
푹신한 소파에 잠기 듯 기댄 그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읊조립니다.
크로쉬 일럼:분명 후회할 텐데. 아주 많이 아플 거고, 아주 많이 괴로워질 거야. 너는 최선을 다했잖아. 이제 도망쳐도 될 거고, 쉬어도 괜찮을 거야.
너도 이제 알잖아.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멀어진 지 오래라는 걸. (고개를 돌려 네 눈을 올곧게 마주한다. 네 기억 속 남아있는 그 모습 그대로, 정말 현실처럼.)
넌 뭘 위해서 싸우는 거야?
스웨인 휘슬러:나는, 널 위해 싸워. 너와 있을 이 세계를 위해서 싸워. 세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와 있기 위해서. 그렇기에 싸웠고 지켜내왔어. 이제와서 도망치고 싶지 않아. 쉬고 싶어 나도. 어떻게 싸우기만 하곘어. 그렇지만... 이대로는 안돼. 그런 기분이 들어. <그리하여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말은 동화책에서나 쓸 법한 말이지 현실은 달라. 우리는 어제를 살아왔고 지금을 살아가며 내일을 살아갈거야.
(실내의 조명이 꺼진다. 문 앞의 조명은 이 문을 열고 나가 싸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문을 잠시간 바라보다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 크로쉬를 본다. 미안, 그리 말하고는 크로쉬의 머리 위로 살풋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싸우는 이유? 당연하잖아. 나는 언제나 그럤어. 너를 위해서라면, 네가 나로 인해 이상해졌다면. 나는 기꺼이 몸을 내던지겠어.)
(성큼 다가간 문의 문고리를 잡고 연다.)
현관문은 오늘따라 단단하고 굳게 잠겨 있지만, 당신이 손잡이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쉽게 열립니다.
스웨인 휘슬러:(눈을 깜빡인다. 자신부터 에보니 그린, 그리고 죽지 못한 다른 이들까지. 모두가 이 자리에 묶여있다. 뒤로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못한채, 고장난 시계처럼 영원히 멈춰버린 시간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삶을 만든건 다름 아닌 자신이다. 자신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내가 그날 널 그렇게 구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너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에도 응당 내가 가서야 했다. 널 구하기 위해. 이 모든걸 끝내기 위해.)
(나아가야한다. 늘 그리해왔듯. 뭐, 어차피 늘 그랬지 않은가.)
스웨인 휘슬러:저는 늘 무언가와 싸우며 살았으니 이제 와 새삼스레 어렵지도 않습니다. 저는, (긴 숨을 뱉고 허리를 피며 모두에게 고하듯 말한다.) 인류의 최전방을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당신이 부탁에 응하자, 에보니는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에보니 그린: 정말, 변하지 않았군요. (작게 웃으며)
중앙 관리 체제에는 반경 1km의 강력한 쉴드가 펼쳐져 있어요. 그걸 부수기 위해선 안전지대의 남쪽과 북쪽, 총 두 곳에서 쉴드의 약점을 파괴해야 해요.
민간인에게 방해받거나 목격되지 않는 곳, 그리고 탄환의 사정거리 내에 있는 곳은…… 여기예요.
각각 (구) AOC와 X제약 회사의 옥상입니다.
에보니 그린: 지금 위치는 AOC 건물의 지하거든요. 이쪽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겠어요. 죄송합니다, 휘슬러. 안타깝게도 제약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네요.
스웨인 휘슬러:(자료를 든 몸이 휘청인다. 가까스로 뒤로 넘어가지는 않았으나 얼굴을 짚은 손 아래로 흘러나오는건 깊은 분노, 슬픔, 원망이다. 누구를 향해? 당연히 저 스스로를 향해. 그를 구한다는 핑계로 희생한 것도 자신, 그를 망가뜨린 것도 자신. 아, 너 정말 이계의 것과 무언가를 했구나. 그래서 돌리려한거야. 전부 다.) 하하, 나 진짜 어떡해야해... (어떻게 해야 널 되돌릴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은 한가지 결론 밖에 내놓지 않았다. 옥상으로 향하라고.)
ㅁ, 뭐? (뭐라고 말을 붙이려했으나 그 자리에서 도망친 사람을 보고 입술을 짓씹었다. 솔직히 말해, 놀라긴 했지만 패닉이 올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니게 되었고, 사람이 아니었으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와 반대로 걸어가게된 그가 있었다. 그럼 이제는, 불에 태워도 살아나게된 나와 100년을 살아가는 그는 이제 사람이라 불려도 되는걸까.)
(엄중히 잠긴 옥상문 앞에서 긴 한숨을 내쉰다. 이번에도 옥상이다. 그때도 그랬다. 서로 뒤바뀐 너와 나. 서로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옥상으로 달렸었지. 달라진게 하나도 없다. 그떄도, 그 이후로도, 지금도. 그러나 결과는 하나 뿐이다. 도망치지 않고, 맞설 뿐. 한 번의 짧은 심호흡 후 그대로 보안장치를 가격해 부순다.)
보안 장치를 가격하면 너무나도 손쉽게 망가집니다.
가볍게 열리는 문.
회청색 세계 위, 눈이 휘날리는 허공에는 정육면체의 기계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습니다.
스웨인 휘슬러:나보고 그만 좀 살아돌아오라고 해놓고 안드로이드는 나를 만들어서 여기다 둔거야? 크로쉬 일럼, 성격이 나빠진거야 내가 그만큼 싫은거야. 어이가 없어서. (그런 것 치고는 어쩐지 묘하게 기쁜 얼굴로 웃는다. 아, 너 날 최강의 인류라는 이름 아래 계속 기억했구나. 그 사실이 못내 기뻐서.)
스웨인 휘슬러:어차피 날고 기어봐야 안드로이드. 날 모방해서 만든거잖아. 그리고 너, 실망했다고 말하는거 치고는 날 공격하지 못하는데? 크로쉬, 나야말로 네게 실망이야. 날 얼마나 물로 봤길래 이 정도가 끝인거야. (그러고는 씩 웃는다. 아, 다행이다. 싸우는게 크로쉬였다면 이 정도로 진심으로 싸우지 못했을텐데. 싸우는게 내 얼굴을 닮은 가짜라서 정말 다행이다.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눈의 검을 휘둘렀다.)
당신과 같은 신념은 아니지만, 안드로이드 스웨인 역시 그가 생각한 정의를 위해 이곳을 지켜왔습니다.
당신은… 쉴드를 부술 수 있습니다.
스웨인 휘슬러:...부숴야지. 부숴야만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산 사람을 살아가야지. 죽은 사람들에게 매달리는게 아니라. 이별과 상실은 힘들겠지. 나 역시도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무슨 선택을 했을지 몰라. 기만일 수 있어.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그래, 전부 다 잊고 없던대로 살아가라는게 아니야.
너는 너의 선택으로 크로쉬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을 지킨 것 뿐. 나는 나의 선택으로 과거에 묶인 크로쉬와 되살아난 사람들, 안드로이드들의 손길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살아돌아왔어. 내 바보같은 말 한마디가 이 모든 사단을 낸 거겠지.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겠어. 그 말만큼 각자의 선택을 무시하는 말도 없을테니까. 단지,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는 지키고 싶어.
소중한 사람이 죽은 사람을 붙잡고 계속 상처입고, 멈춘채로 살아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스웨인:… 그렇군. 결국 내가 그 사람, 크로쉬에게 스웨인 휘슬러로 인정받지 못한 건 이런 이유인가. (하, 새어 나온 웃음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스웨인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당신에게 내밉니다.
스웨인:미고의 전언이다. 나를 부수는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더군. … 만나봐서 알겠지만, 크로쉬는 너를 너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와 마찬가지로.
스웨인 휘슬러:(전언이라. 그가 내민 것을 말없이 받아든다.)
스웨인:내가 가동을 완전히 중지하고, 쉴드를 깬 이후 확인하도록 해. (지직, 자잘한 스파크가 몸에서 튀어나간다.)
한 가지 묻지, 스웨인 휘슬러. 100년 전에 갑자기 사라진 크리쳐들. 그리고 아무리 죽여도, 심지어 불태워버려도 끊임없이 살아나는 너.
이정도 말한다면 너도 알아들었겠지.
넌, 네가 진짜 스웨인 휘슬러라고 생각하나?
...딱히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오히려... 크리쳐들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를 메꿔 태어난 '무언가'라고 생각했지. 나는 그 때 없어졌어야해. 살고 싶다 말한들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이었을리가. ...그래서 멈춰야해. 너와 안드로이드들을 멈추고 나까지. 전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이야.
당신의 말을 들은 안드로이드는, 결국 두 눈을 감습니다.
과거에 얽매여 머물러있던 죽은 이 중 하나였던 그는 먼저 길을 떠납니다.
당신의 안드로이드가 내민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빔프로젝터입니다.
간단하게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스웨인 휘슬러:(자신과 같은 얼굴로 눈을 감은 안드로이드를 조용히 내려다보다 버튼을 눌러 화면을 켜본다.)
스웨인 휘슬러:인간이 된 크리쳐에 외계의 것이 집어삼켜 인간인척을 하는 무언가라.... 참, 웃기지. 내가 바란건 네가 살아가길 바란 것 하나 뿐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원 하나로 내가 널 이렇게까지 망쳤구나. (하하, 빈 웃음이 흘러나온다. 프로젝터가 분해되며 나온 탄환 하나가 거센 눈발에도 흔들림 없이 손 위에 굳건히 그 모습을 유지한다. 우리는 100년 전에 멈췄어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모든게 거기서 끝났어야했건만, 내 소원 하나로 이 지경까지 만들었으니 끝내는 것 역시 내가 해야만한다.)
크로쉬, 소중한 나를 몇번이고 죽이는게 힘들다고 했지. 그 말 정말인지 이제는 모르겠네. 너는 내가 살아있길 바란건 맞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너를 막으려는 나를, ...나를. (아니, 이건 원망이고 투정이다. 나는 뻔뻔스레 내 손으로 망친 그를 살해해야만하는 결과값을 마주본다. 아, 괴롭다. 울고 소리지르고 싶다. 어디서부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가야겠지. 여기까지 와서 멈추는건 그렇잖아. 그러니까... 가자. 너를 끝내고, 나를 끝내고. 그러면...그 때가 되면 너한테 맞고 혼나려나. (텅 비어버린 웃음을 흘리며 옥상을 벗어난다. 가야한다. 남은 쉴드를 부수러.)
활짝 열린 문, 옥상 난간에 기댄 크로쉬가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 당신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아니라, 훨씬 오래전부터 당신을 기다렸던 것만 같아요.
그의 등 뒤로 불길한 빛을 뽐내는 박스가 보입니다.
인사합시다.
당신이 모르는, 당신만 알지 못하는 악의에게.
크로쉬 일럼:왔네. 이번에야말로 무언가 다르길 기대해도 되는 거지?
나야말로, 이번에는 다짜고짜 사람한테 총을 쏘지 않길 바라도 되는거겠자?
크로쉬 일럼:그래도 나는 아프지 않게 죽여주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음식을 안 먹었잖아? 넌 매번 날 볼 때마다 그러더라. 먹지 않을 걸 알면서도 준비하는 내 고초도 좀 생각해 줄래? (여전히 옥상 난간에 기댄 채 이제는 지루함을 숨기지 않겠다는 듯 감흥이 없는 반응을 보인다.)
스웨인 휘슬러:음식? 아~ 독을 준비해오라고한게 그 이유였어? 먹을거에 장난을 치다니, 언제부터 이렇게 치졸해진건지 모르겠다 크로쉬. (그런 그의 태도에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네가 준비한거야?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준비해서 가져온거지. 네 스스로한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말이 웃기네.
뭐,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 (빙긋 웃는다.) 어차피 너는 날 진짜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 날 계속 죽인거잖아.
크로쉬 일럼:그럼,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직접 손을 쓸 필요가 있나. 내가 치졸한 인간이란 걸 이제야 알았다니 너도 참 아둔하구나. (이어지는 말에 보이는 한쪽 눈이 가늘어진다.) 그새 친해졌나 보네. 쓸데없는 이야기나 들은 걸 보면. 하긴, 그것도 네 데이터로 만들어진 거였으니 해도 되는 말 안 되는 말 구분을 못하는 모양이지.
스웨인 휘슬러:응? 내가 걔한테 들은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설마, 지레짐작했어? 내가 말을 들은건 다른 쪽인데. 예상이 빗나가서 아쉽겠어? 내가 그 안드로이드랑 한거라고는 칼부림 뿐이라고.
아참, 걔 너무 약하던데. 날 모방해서 만든 것치고는 너무 성의없던데. 날 얼마나 얕잡아본거야. '내 전력'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는데. ...뭐, 100년이나 지났으니 옛날 일을 기억 못하는 할아버지들처럼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겠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뭐 하나 멀쩡한게 있어야지, 둘 다.
크로쉬 일럼:하. (어이없다는 듯 터져 나온 웃음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긴 앞머리를 손으로 넘기다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다.) 맞아, 그 녀석은 실패작이니까. 애당초 널 모방한 것부터 잘못이었지. 그래도 나름 쓸 만은 했어. 보통의 안드로이드보다는 강했거든. (걸음을 옮긴다. 옥상 중앙, 멈춰 서서 제 눈앞에 있는 이를 바라본다.)
스웨인 휘슬러:아, 더럽게 아프네. (유효타는 두번. 이쪽의 유효타는 한번도 없다. 고민이 되네, 정말이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건 난데 여기까지 오면 내 머리에 총을 박고 싶어진다고. 그래봤자 너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겠지만. 이런 몸이 되어서 쓰러지는 것조차 마음대로 안되니 일단 라이플을 들고 쉴드를 향해 쏜다.)
스웨인 휘슬러:(쿨럭, 총을 쏘면서 생긴 반동에 몸이 맥없이 흔들린다. 제대로 들어온 총알이 몸에 박혀 살을 찢어발기는 느낌이 선명하다. 피가 붉은 색인지, 검은색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알겠는건 깨어진 쉴드, 내가 해야할 일. 그래, 쏴야한다. 저 망할 것을 쏴서 우리 둘 다 끝내야해. 크로쉬의 방해에도 기어코 열쇠 탄환을 라이플에 박아넣고, 그대로 쏜다. 한번 더, 탕. 하고.
화려한 조명이 흩어지며 검게 그을린 회색 벽이 드러나고, 관리 체제로 이루어진 것들이 붕괴합니다.
새하얀 빛이 번지며, 당신은 모든 것의 끝을 예감합니다.
(몸이 휘청이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겨우 움직일 힘을 가지고 있던 몸을 이끌고 바닥을 기듯 다가가 그를 끌어안는다. 100년만의 진정한 재회일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저 나는... 나는... ) 너를 보고 싶었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어. 두고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는데. 너무 오래 걸렸네.
크로쉬 일럼:(자신을 품 안으로 끌어안는 온기가 있었다. 광기에 집어삼켜진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걸까, 아니면 이 또한 거짓일까. 그건 이제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움직일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 처음에는 원망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나도 네 말처럼 열심히 살아 보려고 했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거 같아서. 근데 역시 무리였나 봐. 나는 너랑 다르게 정의롭지 못했거든.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네 옷자락을 붙잡았다.) 너랑 어울린다고 어느새 나도 영웅이 되었다고 생각했나 봐.
스웨인 휘슬러:하하, (울음이 나올 것 같은 얼굴을 그의 어깨에 기대어 숨긴다. 그와 살던 시절 그가 제게 화를 낼 때마다 자신은 곧장 그를 끌어안아 장난을 치고는 했었다. 그 때마다 그는 빈번히 이런 식으로 회피하지 말라 화를 냈었다. 아, 불현듯 잠시 크리스마스의 순간을 꿈꿨을 때 보았던 그가 떠오른다. 다녀오라고 했지. 잘 다녀왔다고 해야하는데..그러기엔 너무 피곤하다. 너무 졸려.) 크로쉬. 미안해. 해 줄 말이 미안하다는 말 뿐이라... 나 완전히 바보가 됐나봐. 나 네가 영웅이라고 부를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난 그냥..바보야. 이도 저도 해내지 못하고 죽은 바보. ..그런데 너는 왜 나를 영웅이라고 불러. 차라리 화라도 내지.
너도 나도 왜이렇게 바보가 된걸까.
크로쉬 일럼:그걸 이제 알았어? 너는 원래 바보였어. (장난스레 건네는 말이 익숙하다. 일순 불어오는 바람이 따스하게만 느껴져서, 꼭 너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있던 자신들의 집을 떠올리게 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가 피부에 닿아 녹는 순간까지.) 나밖에 모르던 바보. 하지만 고집 센 바보. 결국은 착했던 바보. 나를 만나겠다고 무모하게 뛰어드는 바보…. (손을 뻗어 네 머리카락을 귀 뒤로 조심스레 넘겨준다. 이쪽을 봐달라는 듯이.) 나는 아니었는데,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너랑 똑같은 바보가 되어버렸네. 누구 하나는 제정신이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니까 이쪽 좀 봐줘, 이 바보야. 마지막인데, 얼굴도 안 보여줄 거야?
...나도 나 바보인거 알아... (어깨에 파묻혀 있던 얼굴이 그의 말에 천천히 떨어져 울듯하지만..억지로 웃는 얼굴을 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서야 마주보게 된 그의 얼굴은 안대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 그래 안대. 손을 뻗어 안대가 채워진 뺨을 쓸어본다.) 속상해. 눈이라니, 네 눈이 얼마나 예쁜지 알아? 밤하늘보다 더 깊고 보석보다 더 반짝인 네 눈이었는데... (그러고는 잠시 침묵. 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말이 잘 나오지를 않는다.)
크로쉬, 이런 말 하면 화낼거 알지만... 그래도 말해주고 싶어. ...나, 이번에는 너보다 늦게 죽을게. 어감이 이상한거 알아. 그렇지만.. 너는 날 100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렸잖아. 늘 내가 눈 감는 것만 봤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널 품에 안고 끝맺음을 바라볼게.
크로쉬 일럼:알고 있다니 다행이야. (드러난 얼굴은 참 못난 얼굴이라서,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못나고 사랑스러운 얼굴, 그 얼굴을 새겨 넣겠다는 듯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천천히 더듬어 간다.) 지금은 흉측해서 못 보여줘. 그래도 하나는 남아 있잖아. 이렇게 널 볼 수 있도록. (눈가에서부터 코, 입술까지 조심스레 쓸어내리던 손이 네 뺨을 감싼다. 이어 고개를 약히 저으며)
아니, 화 안 내. 사실 부탁하려고 했거든. 있지, 스웨인. 내가 죽은 뒤에도 이곳을 살펴줄래? 나처럼 이곳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그저 지켜봐 주면 좋겠어. 내가 망쳐버린 이곳을 너한테 떠넘기는 것과 다름이 없겠지만, 남은 이들이 무사히 일어서서 미래를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모두 괜찮아지고, 내가 보고 싶을 때 그때 오는 거야. 할 수 있지?
스웨인 휘슬러:......하하, 죽는게 아니라 살펴봐달라고 하는거야? .....하긴, 그렇지. 내가 이대로 죽으면..그건 그것대로 너무 쉽겠지. 널 이곳에 혼자 둔 바보멍청이인데 이대로 죽으면 너무...너무.......... 하하, 아.... (불현듯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다. 끝을 또다시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의 관계.)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후회하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러면 안되는거겠지? 너는 꿋꿋하게 견뎠으니까.. 응, 그래. 이번에는 내가 노력할게. 너는 이 세계를 망친게 아냐. 너 나름대로 노력한 것 뿐이야. 수많은 안드로이드들과 사람들의 생각이 달랐을 뿐이지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었을 뿐이잖아? 그러니까 넌, 잘못한게 아냐. 노력한 것 뿐이지. 나 많이 노력할게. 노력하고 노력해서... 정말로 끝나면 너한테 갈게.
나 잘 할 수 있어. 네 파트너니까, 네 연인이니까. ...잘 해낼게.
크로쉬 일럼:이건 벌이 아니야. 너 혼자 짊어질 죄도 아니고. 그저, 그저 내 욕심이지. 내가 아니라 네가 살아있었다면… 네가 미래를 그려 갔었더라면, 하고. 그리고 그 옆에… (뒷 말은 더 이상 이을 수 없었다. 그게 미련이 될까 봐, 후회가 될까 봐. 이 세계를 구한 영웅과 그곳을 망친 악당임이 분명한데도, 너는 그런 나를 위해 노력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 넌, 분명 잘할 수 있을 거야. 내 파트너이자 연인이고, 또… 내 영웅이니까. (점점 흐릿해져 가는 시야, 언제나 총명하게 빛나던 검은 보석이 빛을 잃어간다. 이제는 네게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목소리가 속삭인다.) … 스웨인, 마지막으로 입 맞춰줄래?
하하, 그거 알아? 나.. 그 말만을 기다렸어.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 눈발에 휘날려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 아, 네가 사라져간다. 날 두고서 간다. 아프지만 이것이 내가 받아야하는 벌. 사랑하는 널 두고 간 나의 죄. 눈물이 고여 떨어진다. 그것이 그의 뺨에 떨어져 녹은 눈과 함께 뺨을 타고 흐른다. 고개를 숙여 차가워진 그의 입술 위에 입술을 맞댄다. 그리고 작게 속살거린다.) 사랑해, 크로쉬 일럼. 네가 어디있든, 너를 사랑해.